교회의 대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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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개요
7세기 및 8세기에 들어서게 되자, 유럽은 중요한 사건을 겪게 된다. 그것은 크게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수도원 운동, 두 번째는 프랑크 왕국의 성립, 세 번째는 이슬람의 팽창, 네 번째는 동서 교회의 대분열,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수립이다. 7세기와 8세기에 벌어진 이 일련의 사건들은 중세의 남은 기간 동안 서방 세계의 종교적·정치적 구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무함마드의 추종자들, 즉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곳 북아프리카 출신이다)와 동지중해를 기독교의 영역에서 빼앗아갔다. 그리고 북유럽에서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벌어져 로마 교황의 권위를 세워나갔으며, 로마 교황청은 유서 깊고 세련되며 반동방적(半東方的)인 동로마 제국과 북방의 새로운 세력(게르만족,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로마의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왕 및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고, 그들의 결단은 이후 중세 유럽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이 사건들은 일종의 병목 현상을 일으키면서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726년의 비잔티움 황제에 의한 우상파괴령이다. 먼저 비잔티움 제국과 서유럽의 상황, 그리고 자극제 역할을 한 수도원 운동, 이슬람과 프랑크 왕국에 대해 먼저 간략히 다루고, 그 다음에 우상파괴령에 다루고자 한다.
[편집] 당시 주변 상황
[편집] 수도원 운동
일찍이 동지중해에서 출발한 수도원 운동은 초기 중세 유럽 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전 문화의 보존 및 전달, 이교도들의 개종이 그들의 주요 임무였다. 그것은 불가분의 관계로 코꿰여졌던 바, 이교도들의 침입으로부터 고전 문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전도 사업이었던 것이다. 동지중해와 이집트의 사막에서 출발한 엄격한 수도원 운동은 갈리아로 전파되었다. 이집트 출신의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주변이 몽땅 이교도로 넘쳐났으므로 그들의 개종에 나섰던 것이다. 갈리아에 전파되었던 수도원은 다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이 두 섬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도 활동과 수도원 운동이 전개되었다. 사실상 7세기와 8세기에 들어가면서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의 선교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거꾸로 그들이 보존한 여러 고전 문화들이 대륙으로 역수출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틴어로,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고전 문법책을 구해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반면, 대륙의 라틴어들은 지방 속어들과 융합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오늘날의 유럽 대륙 국가들의 언어가 형성된 시기이다).
그들은 단순히 고전문화만을 보존하고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 대륙에서 섬나라로 들어갔던 기독교가 이제는 다시 섬나라에서 대륙으로 퍼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일랜드 출신 수도사인 보니파키우스(Boniface, 680년 ∼ 755년)이다. 그의 별명이 ‘독일인의 사도’(또는 게르만 사도[1]) 였으니, 그의 활동 무대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뒤에 다시 보겠지만, 서로마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를 위해 정략적으로 파견되었으며,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의 첫 번째 왕 피핀 3세에게 왕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세례식을 한 장본인이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출신의 수도사들은 농촌 지역의 미개하고 원시적인 농민 대중을 대량 개종시켜 유럽을 기독교 대륙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계열의 기독교로, 그의 출발지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였다. 대륙의 기독교 수도원들은 대부분 보니파키우스의 영향을 받아 아일랜드 베네딕토계의 계율을 받아들였다.
특히 보니파키우스의 업적은 두 방향에서 이후 서방 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첫째는 그의 전도 사업으로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최초로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둘째로 갈리아 지방에서 그의 활약으로 프랑크 국왕과 로마 교황 간의 관계가 전례없이 밀접해지게 되었다.
[편집] 비잔티움 제국과 이탈리아
동서 로마가 분리되었지만, 제국의 중심은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와 야만인들이 설치는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므로, 비잔티움 제국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5세기와 6세기를 통틀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들은 자국을 지켜내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간신히 동방 지역에서 황제권을 수호할 뿐, 서방 속주의 탈환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6세기 중엽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등장하고서야 겨우 타개된다. 게다가 그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등 라틴 문화를 고수했던 황제였다. 그 이후에 비잔티움 제국은 급속히 그리스화 하였다.
7세기 들어 비잔티움 제국의 관심사는 동지중해 지역에 집중되었다. 게르만계열의 야만족들에게 유린당한 서유럽의 속주들은 그들에겐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미 그리스화 한 그들은 서방보다는 동방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켰고, 강력한 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맞부닥치게 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중요한 점은, 비잔티움 제국이 동방에 관심을 집중하면서도 계속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간섭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로마와 이탈리아가 갖는 역사적 중요성,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가지는 의미 등으로 인해 동로마는 여전히 8세기에 들어서면서도 이탈리아 반도를 수중에 넣고자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었다.
동지중해에서 옛 대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던 비잔티움 제국은 새로운 적과 마주치게 되었다. 새로운 적은 이슬람 세력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들과 오랜 투쟁에 들어가야 했다.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되었다.
[편집] 이슬람과 프랑크 왕국
이 두 세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30년, 메카 市의 정복을 시작으로 전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동지중해를 장악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노린 이슬람, 그리고 거의 동시대에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 이슬람이 우상파괴령에 영향을 미쳤다면, 프랑크 왕국은 우상파괴령을
둘러싼 동서 교회의 대립에 서로마 교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미 페르시아와 이슬람을 상대로 한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서로마
교회가 독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크 왕국은 두 개의 새로운 서로마제국을 만들어냈다. 800년의 서로마제국과
96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립이다. 서로마교회는 프랑크 왕국 덕분에 동로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새로운 서유럽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편집] 726년,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 우상파괴령을 발하다
수도원 운동으로 서로마 교회는 수많은 이교도 야만족들을 개종하였으며, 그 중에 한 부족인 프랑크족은 통치상의 필요로 서로마와 가까와지고 있었다. 라틴화 된 갈리아를 지배하는데에 라틴 문명인 서로마 교회의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크족은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부터 서로마 교회를 지켜주었다. 로마 교황이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방 교회와의 신학 논쟁도 있었으나, 그것은 명분에 불과했다.
8세기 초 이슬람의 침략을 물리친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는 심각한 문제에 처했다. 하나는 성상 숭배였고, 다른 하나는 대토지 소유에 의한 조세 수입의 격감이었다. 새로 개종한 이교도 지역일수록 우상 숭배는 심했다. 여기서 '성상'이라 함은 성인들 을 그린 그림, 조각, 모자이크,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문맹인 야만족들을 개종하는데에 제법 짭짤한 효과가 있었지만, 기독교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 우상들을 숭배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던 것이다. 우상 숭배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신앙심 깊었던 황제 레온 3세는 이런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다른 문제는 소토지 보유 자유농의 몰락과 대토지 겸병의 증대였다. 소규모 자영농은 제국군의 주력을 이루었으므로 제국 정부로서는 그들의 몰락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에게 넘어갈 지도 몰랐다. 대토지 소유자들 중에서도 레오 3세가 적대시한 것은 수도원과 교회가 소유한 대영지였다. 게다가 이 양자는 면제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 3세는 우상파괴령을 이용하여 토지 개혁을 달성하고자 했다. 토지 개혁이 이뤄지면, 소규모 자영농이 증대하고, 조세 수입도 증대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726년에 첫 성상파괴령이 내려졌다(그 후, 몇 차례 번복 과정을 거치면서 843년에 성상파괴령은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오늘날 동방정교회의 성상(이콘)은 아주 정교한 모자이크화로 매우 아름답다). 이 파괴령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이전까지는 교리상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들은 비잔티움 황제의 충성스런 신하로 자처했으며, 황제를 자신들의 군주로서 존경과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의 성상파괴령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도전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제 막 개종한 북방 야만족들의 힘을 빌려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격분한 레오 3세는 라벤나 총독에게 그레고리오 2세의 체포를 명령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라벤나 총독은 황제의 명을 받아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출동했다. 그러나 그들은 롬바르드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분격한 레오 3세는 남이탈리아와 일리리쿰에서의 교황의 권리를 모두 몰수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넘겨주었다.
[편집] 프랑크 왕국과 피핀, 그리고 동서 교회 분열의 완성
이탈리아에서 사건에 영향을 미친 마지막 요인은 롬바르드족이었다.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였기에 교황에게 우호적이던 롬바르드족이었으나, 아이스툴프 왕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전체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는 로마 교회를 새로운 이탈리아의 중심 교구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 베드로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 서방 세계의 기독교를 다스린다는 체면이 있던 로마 교황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롬바르드 왕국의 최고 성직자에 불과한 존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청할 생각도 더더욱 없었다. 결국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야 했고, 이 때 등장한 인물이 피핀이었다.
751년, 왕이 되고자 했던 피핀 3세는 보호를 약속하는 대신,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재가를 로마 교황에게 요구했고, 교황 자카리아는 즉시 보호를 댓가로 그를 새로운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인정하였다. 피핀은 752년에 로마를 위협하던 아이스툴프를 완전히 패배시키고, 중부 이탈리아와 라벤나를 차지했다.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비잔티움 제국은 라벤나를 제국령으로 귀속시키라고 요구했으나, 피핀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기가 롬바르드족과 싸운 것은 어디까지나 성 베드로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성 베드로에게, 즉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넘긴다고 선언하였다(이것이 교황령의 시초이며, 그 중에 일부 남은 것이 오늘날 바티칸이다).
이로써 서로마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밀접하게 결합되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기독교 세계는 1차 대분열을 하게 되는 것이다(2차 분열은 16세기에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 일어난다).
[편집] 주석
- ↑ 또는 게르만사도: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교양》(들녘, 2001) 107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