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간략한 세계사

9. 로마제국(Roman Empire : 羅馬帝國) (2)

흑수선화 2010. 1. 27. 15:58

09. 로마제국(Roman Empire : 羅馬帝國) (2)                                    

(3)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

 

이른바 중소 자영농민이 주축을 이룬 중장보병은 대외 적으로 악명 높은 로마의 군대였지만 그들 사회에서는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이미 왕정시대부터 인접국 가를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고, 공화정 시대에도 꾸준히 정복을 계속해서 BC 4세기 후 반에는 라티움 일대를 통일하였다.

 

다시 BC 3세기 전반에는 이탈리아 중, 남부 산악지대의 삼니움족을 항복시키고, 이어서 그리스계의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와 동맹한 남 이탈리아의 타렌툼과 싸워, 고전 끝에 피로스를 이탈리아에서 퇴각시키고 타렘툼을 점령하여 BC 3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세력하에 두게 되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로마는 정복지에 대하여 자치를 허용하고, 다만 군사와 외교권만을 행사하여,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로마를 맹주로 하는 군사동맹체를 만들었는데, 이 동맹군은 로마시민이 정규 군단을 편성되고 동맹국은 보조군이 되어 로마 정규 군단의 지휘에 따르게 하였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해외로 진출하였을 때에도 처음에는 그러한 형태의 군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4) 포에니 전쟁과 로마의 지중해 해상권 장악

 

정복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여세를 몰아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그곳에는 셈어계의 페니키아인 들이 세운 강력한 해양국가 카르타고가 있어서 지금 까지 싸운 어느 적보다도 강했기 때문에 로마로서는 도박에 가까운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로마가 피로스와 전쟁할 때까지만 해도 동맹관계를 맺어 우호적이 였으나 지중해를 둘러 싼 해상권의 다툼은 결국 두 나라를 운명적으로 가르게 되었던 것이다.

 

시칠리아 섬을 지배하고 있던 카르타고는 서부 지중해 최대의 상업 민족으로서 그들의 선단은 주석을 찾아서 브리타니아(영국)에도 갔고, 상아와 황금을 찾아서 아프리카 서해안에도 수시로 내왕하였으며, 자국의 농토에서는 다량의 밀을 생산하여 식량의 자급을 이루는 안정된 강국이었다.

 

정치면에서도 로마와 같이 귀족 중심의 공화정을 펴고 있었으나 민정과 군정이 엄격히 구분되어 장군은 종신제 에 가까웠고 로마에는 없는 우수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비해서 로마는 군의 통수권을 가진 집정관이나 독재관의 임기가 1년 혹은 6개월이 였으므로 아마추어에 불과했고 중장보병의 육군이 주를 이루었다.

 

객관적인 비교에서 로마는 카르타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로마는 승리하고 카르타고는 멸망하였다. 이 전쟁을 로마사람들은 포에니(페니키아의 로마식 명칭)전쟁이라 한다.

 

이 전쟁은 120여 년간에 걸쳐 3차로 나 누어지는데 1차 포에니 전쟁(264 ~ 241 BC)의 원인은 시칠리아의 멧사나에서 이탈리아의 용병대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있는 시라쿠사의 왕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로마에 구원을 요청한데서 시작한다.

 

구원의 요청을 받은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카르타고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군대 파견을 주저하고 있을 때 민회에서 구원군 파견을 결의하여 시칠리아에 로마 군이 들어가게 되었고(264 BC)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시라쿠사왕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로마에 항복함으로서 여기를 거점으로 하여 남부 시칠리아를 어렵게 점령하였다.

 

그러나 로마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가 카르타고 에 맞설 수 있는 함대를 건설하고(260 BC)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여 카르타고 함대 를 무찌르고 카르타고에 상륙하였으나(259 BC) 스파르타인 용병대에 패하여 돌아왔고, 그 후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사병(私兵)에게 로마 군이 전멸의 위기에 빠지자 로마는 해군력을 정비하여 이를 토벌하였는데 전쟁의 확대를 두려워한 카르타고가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로마는 많은 배상금과 함께 시칠리아를 차지하였다.

 

처음으로 해외에 영토를 얻은 로마는 본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점령 지로 생각해서 트리부스를 신설하여 로마시민을 이주시키는 것과는 달리, 총독 (quaestor)을 보내어 10분의 1 비율로 조세를 부과하고 징세와 치안의 필요에서 관리와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 후 다른 점령지에 대해서도 이런 형태를 취하고 이를 "프로빈키아" 즉 속주(屬州:Provincia)라 불렀다. 이 때부터 동 지중해의 헬레니즘 왕국과 도시들을 점령하고 많은 속주를 건설하였다.

 

2차 포에니 전쟁(218 ~201)은 한니발 전쟁이라 할 만큼 카르타고가 로마에 벌린 복수전이었다. 알프스를 넘고, 코끼리 부대, 칸네전투, 스키피오 대 아프리카누스 등 등 고대 세계의 최대 전쟁 이였던 이 전쟁은 한니발과 함께 너무나 많이 알려진 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만 로마에게 패배한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를 비롯해서 해외 식민지 일체를 로마에게 넘겼고 함대도 20 척만 남기고 넘겼으며, 이 후 50년간 매년 2백 탤런트의 배상금을 물기로 하였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저력은 참으로 놀라 와서 50년간 갚기로 한 배상 금을 10년만에 지불하고 다시 번영을 시작하자 로마는 이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중, 카르타고가 그들을 괴롭히는 누미디아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자 이를 핑계로 카르타고를 침공하여 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149 ~ 146)

 

카르타고는 울면서 로마에게 사정했지만 로마는 카르타고를 점령하여 철저히 파괴하고 시가지는 17일 간이나 불 타는 연기로 가득했으며 50만 인구 중 살아남았던 5만 명은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 버림으로서 카르타고는 역사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로마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아나톨리아 동맹 등과 싸워 이 방 면에서도 우위를 확립하였고, 점령지마다 Provincia(屬州)라는 형태로 해외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를 호수화하기 시작하여 로마를 축으로 하는 국제사회를 이룩해 나갔다.

 

로마에서는 노빌리타스의 지배가 확립됨과 더불어 과두정치(寡頭政治)의 사고방식이 뿌리를 내리는 등 또 다른 사회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

 

(5) 공화정의 위기

 

도시국가 로마가 세계적인 제국으로 날개를 펼 침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이익 못지 않게 그 반작용 또한 심각한 것이었다.

 

 전 쟁 포로의 형태로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노예는 부유한 지배계급에게는 대토지소유의 기회가 되어 대농장(L atifundium)을 만들었지만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일자리와 농토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정복지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값싼 곡 물은 로마군대의 중핵이었던 중소 농민을 몰락시켰다.

 

중소 농민 층이 몰락한다는 것은 지금 까지 로마가 정복의 핵심이었던 중장보병의 군사력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에 의존한 로마가 그 군사력을 포기했을 때 지금 까지 누렸던 영화도 포기해야 된다는 이치를 모르는 과두정치가 (寡頭政治家)들은 위기로 보지 않고 오히려 "위엄 있는 한가(閑暇)만이 세상을 다스 릴 수 있다"하여 진정한 위기를 통찰하지 못하고 자기와 자기 당파의 이익과 명예만을 탐 하였다.

 

이리하여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로마의 발전도 시민간의 빈부차(貧富差)를 심화시키고 대내적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이를 방관만 할 수 없었던 명문 출신의 그라쿠스 형제는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를 희생시켜 빈민에게 토지를 주어 중소농민을 재생시키고자 꾀하였으나 실패에 그치고 횡사하였는데 이를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라고 한다(133 ~ 123 BC)

 

그들의 개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호민관이 였던 그들은 수 세기에 걸쳐 공동화(空洞 化)하였던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 제도와 민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반역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치가의 활동 유형으로서, 정치적 결정은 원로원의 권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벌족파"(equites :최량의 일족)라 하였고, 민회의 결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평민파"(Publi Cani:포풀라레스)라고 불렀는데 술라나 키케로 등은 전자에, 마리우스나 카이사르 등은 후자에 속했다.

 

그라쿠스 형제가 활약한 10여 년 뒤, 마리우스가 나타나 로마의 국방 위기문제를 들고 나섰는데, 그 해결 방안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지원병으로서 채용한다는 마지막 단 안을 내렸다(BC 107)

 

프롤레타리아란 무엇인가? 토지를 잃고 몰락한 무산(無産)층으로서 무산 층은 중장보병이 갖추어야 하는 무구도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로마의 군제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의 자영농민 출신으로서 이들에 의해서 로마가 세계적인 국가로 발전하였지만 그 결과는 이들의 파멸을 가져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을 군대에 흡수해서 부족한 중장보병의 병력도 보충하고,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함으로서 실업문제등 심각한 현안에 돌파구를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이 장군에게 예속되는 사병(私兵)으로 전락되어 로마사회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즉 장군은 병사를 그 세력하에 보호함과 아울러, 재산이 없는 그들이 퇴역 후 노후 생활에 곤란을 겪지 않도록 부동산 분여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병사는 무력으로써 장군을 지원하는 외에 민회에서 투표권 행사를 통하여 장군(정치가)의 정치행동의 큰 지지집단(支持集團)이 되는 신의관계가 형성되어 결국은 사병화되었다.

 

이후 로마 내정에는 사병을 거느린 장군 들, 즉 이 법을 만들었던 마리우스, 그의 정적이었던 술라, 술라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 등이 이들에 속하며 이들간에 1차 투쟁이 마리우스와 술라간 에, 2차 투쟁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에 전개된다.

 

그러나 광대한 영역에 걸친 로마의 방대하고 어려운 군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는 마리우스의 병제개혁만으로는 부족하여, 마침내 시민권이 없는 속주의 현지인을 보조 군이라는 이름으로 군제에 포함시켜 로마의 정규군의 지휘에 따르도록 했다.

 

외인부대라고 불리던 이들 역시 개인관계로 로마의 장군과 결탁하게 되었고, 로마의 장군으로서도 명장의 권위를 소중히 하면서 평소부터 원주민 전사 계급의 지도자 층인 왕후귀족에 대한 보호자 지위를 확립하고자 힘썼다. 이들 원주민을 새로운 클리엔테스(Clientage:피보호자)라고 불렀다.

 

이 무렵부터 로마의 제1인자들은 원주민 전사 계급의 리더로서 귀족 층과 결탁함으로써 그들의 군사력을 로마의 국방조직 속에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로마의 주도권에 의해 지중해 세계의 전사계급을 통합하려는 색채가 짙어 갔다. 동방 여러 도시의 제1인자들도 그와 같은 구실을 하였으나 도시화되지 않았던 넓은 지역의 왕후귀족들도 클리엔테스로 두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로마의 제1인자에 대해서는 피보호자라 하지만 현지에서는 이들도 여러 가지 형태로 종사(從士)를 거느리고 있었고, 로마의 유력자들은 이 왕후귀족들을 자기의 클리엔테스로 끌어들임으로써 중층적(重層的) 클리엔테스 관계를 맺어 넓게는 원주민 전사층(戰士層)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즉 "원로원 의원- 속주의 제1인자들 - 속주의 일반인" 이라는 3단계의 상하 결합을 기본적인 축으로 하여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여 갔고, 뒤에 로마 세계의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이들 제1인자들은 도시 귀족으로 변신하게 된다.

 

더구나 원로원의 의원들은 저마다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를 좌우하는 클리엔테스를 가지는 한편, 그 자신들 사이에도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맺어, 유력한 의원 밑에 군소 의원이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원로원 안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자는 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지중해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스정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6) 제정 성립의 필요 충분 조건들

 

도시국가시대의 직접민주정치의 전통을 물려받아 전 시민의 참가를 전제로 한 민회가 로마 최고의 결정기관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 국가로 팽창한 로마의 현실에는 맞지 않았다.

 

그 첫 번째 시련은 로마의 남부동맹시에서 시민권 요구로 반란이 일어났는데 로마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코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동맹시 전체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주어 분열을 막았다( 90 ~ 89 BC)

 

그 무렵 소아시의 북 동방에서는 폰토스왕국이 흑해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 에페소스에 진입해서 로마인과 그 일당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였는데 그 숫자가 8만 명이라 한다.

 

이에 로마에서는 술라가 집정 관이 되어(88 BC) 이를 토벌하기 위해서 캄파니아의 작은 도시 노라를 향해 떠났다. 평소 술라에 반감을 갖고 있던 마리우스 일파는 이 기회를 이용, 민회를 열어 술라의 집정관 지위를 박탈하고 새로이 로마의 시민권을 얻은 동맹시의 시민들에게 35개의 트리부스에 분산시킨다는 법을 통과 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술라는 노라의 공략을 중지하고 군대를 로마로 진군 시켜 쉽사리 수도를 점령하여 마리우스 일파를 무자비하게 처단하고 새로이 선출된 집정관으로부터 충성을 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서약 받은 후 다시 노라를 향해 떠났다(87 BC).

 

그러나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로마의 장군이 로마를 점령한 사상유례없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후 마리우스와 술라의 정치적 투쟁으로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술라의 밑에서 그를 도왔던 무명의 폼페이우스가 두각을 나타내고 정치적 수완이 능란한 크랏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Dives 115-53 BC)는 이런 기회에 재능(?)을 발휘하여 거부(巨富)가 되어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외에도 검노(Gladiator) 스파르타쿠스의 반란(72 BC)과 지중해에서의 해적의 횡포 등으로  국내 외가 소란해 지자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가까스로 진압했지만 문제는 해적의 소탕이 힘들었던 것이다.

 

이에 로마는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서 새로이 법을 제정하고 그 사령관으로 폼페이우스를 선정하였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위임받아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불과 3개월 여 만에 해적을 거의 소탕하고 소아시아 일대를 정복하여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속주로 만들었다. 이 때 처음으로 로마의 패권이 유다 에 까지 미쳤다(63 BC)

 

많은 전공을 세우고 로마에 개선한 폼페이우스는 그의 군대를 해산하고 자기 군대에게 지급할 토지를 요구했으나 원로원과 민회 모두 거부하였는데 이 때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 100~44 BC)의 지원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이 때부터 두 사람은 때로는 협력자로서 때로는 정적으로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로마의 실력자 세 사람이 권력을 나누기로 약속했는데(60 BC) 이것을 제1회 삼두정치 (Triumvirates)라고 한다. 집정관의 임기를 마친 카이사르는 약속대로 갈리아 총독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 8년간의 갈리아 생활이 시작되었다(58 BC)

 

기원전 55년 3두 정치로 집정관을 뽑지 못했던 것을 원로원은 크랏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집정관에 선출하였다. 크랏수스는 약속대로 시리아로 떠나 전공을 세우기 위해 파르티아와 싸우다가 전사(54 BC)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여러 가지 구실을 앞세워 임지인 에스파냐에는 대리를 보내고 로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가 로마에서는 극도로 치안이 불안해지고 살인과 약탈이 극에 달하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 한 사람을 집정관에 임명하는 전례가 없던 결정을 내렸다. 이에 원로원과 폼페 이우스가 손을 잡고 국정을 좌우하게 되었다.

 

기원전 49년 1월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통치하는 갈리아를 반환하라는 결의문을 채택케 하여, 원로원으로 하여금 카이사르에게 소환령을 내리게 했다.

 

로마는 계엄령을 발표하여 일체의 권한을 폼페이우스에게 일임하였고, 소환령을 받은 카이사르는 군대를 인솔하여 드디어 속주와 로마의 접경인 루비콘강에 이르렀다. 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군대를 해산하고 단독으로 로마에 가야 하는데...

 

그러나 혼자 로마에 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고, 군대를 대리고 들어가는 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일이고... 잠을 못 자고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이 "주사위는 던져 졌다"고 하여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 반대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폼페이우스는 발칸반도로 도망 갔다가 추격을 피해 다시 이집트로 건너 갔으나, 카이사르의 보복을 두려워했던 이집트 인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48.10 BC) 그 때 그의 나이 59세, 이래서 1차 삼두정치는 막을 내렸다.

 

구비 전승된 이야기 가운데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에서 진을 치고, 소환 명령 마지막 시한의 밤을 보내면서, 그도 머리가 복잡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밖이 소란해서 눈을 떠보니, 안개 자욱한 새벽에 어떤 목 동이 양떼를 몰기 위해 불었던 피리소리를 진군 나팔로 오인한 그의 군대가 출동을 서두르자 주사위는 던져 졌다는 말을 남기고 로마로 진군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일까? 불법을 호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닌지? 또한 가지 폼페이우스의 두 번째 처는 카이사르의 딸이었고 옹서간이 었으나 이 때는 죽고 없었다. 물론 정략적인 결혼이 였으나 두 사람은 매우 금슬이 좋았기 때문에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로마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바뀔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폼페이우스가 죽은 다음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이집트 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그리고 운명의 여인 크레오파트라와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설과 영화 등의 소재가 되어 널리 알려져 있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만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소아시아에 출병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원로원에 보낸 "왔다, 보았다, 이겼다 "(Veni,vide,vici)라는 보고서도 이때의 일이다. 카이사르와 크레오파트라 사이에 난 아들을 카이사리온(Caesarian)이라고 불렀다.

 

폼페이우스를 제거한 카이사르에게 도전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실질적인 로마의 제 1인자가 된 그는 司祭長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당한 불이익을 생각해서 율리우스력을 만들고(4년 단위로 만들어진 당시의 달력은 날짜의 차이가 심해 관직의 임기나 납세의 기한에 영향을 주었다고 함) 빈민을 구제하는 등 문물을 정비하여 민심을 얻고, 드디어 황제의 야심을 가지고 그것을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기원전 44년 2월 15일 다산과 풍요를 비는 축제가 벌어지자 이에 참석했던 카이사르에게 그 부하 안토니우스가 사전의 각본대로 월계관으로 만든 왕관을 올리자 동원된 박수부대만이 박수를 칠 뿐 다른 사람들은 냉엄했다.

 

이에 카이사르가 왕관을 안토니우스에게 반환하자 환호성을 지르면서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번, 그러나 안토니우스에게 월계관을 돌려줄 때만 박수 갈채가 나오자 카이사르는 월계관을 받지 않는 것으로 끝을 냈지만 이 심상치 않는 그의 행동은 공화주의자들을 자극하였고, 그럼에도 그의 황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대하다가 한 달 후 공화파에 의해서 암살 당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폼페이우스가 세운 석조 극장의 부속 건물에서 원로원 희의가 소집되었는데 여기에서 속주에서 카이사르를 왕으로 부르도록 결의하고 이를 봉정하는 의식이 정해져 있었다.

 

측근들과 아내의 만류를 뿌리 치고 좀 늦게 도착하여 지정된 자리에 앉자 한 사람의 탄원자가 앞으로 나와 그의 옷 깃을 잡는 것을 신호로 그의 몸에는 삽시간에 22군데나 칼에 찔렸다. 그 암살 단 가운데는 그의 옛 애인의 아들이자 애인과 밀애한 시기와 태어난 시기로 봐서 자기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양자 부루투스가 보이자 "내 아들아 너도"(Et tu, Brute...)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폼페이우스 동상 아래 쓰러졌다.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그의 유산 상속인으로 지정된 것은 카이사르의 질녀가 낳은 옥타비아누스로서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

 

그는 공화정 말기를 정리한 최후의 승자가 되어 제2차 3두정치(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레피두스) 시대의 최대의  정적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여 2차 3두 정치를 끝내고 로마 및 지중해 세계의 "제1인자들"의 으뜸 가는 자로서 "제1인자(元首)"의 정치를 펼치는데, 여기서부터를 제정시대라고 부른다.  안토니우스와 크레오파트라에 관한 이야기 역시 너무나 유명하기에 여기에서는 접어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