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간략한 세계사

3. 문명의 탄생

흑수선화 2010. 1. 27. 15:56

3. 문명의 탄생

 

1. 인류의 발전 - 문자의 사용

 

가. 한 단계 위로

 

1) 문자(letter)란?

 

의사 전달의 1차적인 수단은 말(言語:language)이겠지요.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해서 말을 했다고는 하나 사용하는 어휘가 그렇게 많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말이라는 것도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살아 가면서 필요한 요소들이 다듬어 지면서 점진적으로 상호간의 약속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복잡하고 질 높은 사회생활을 이룩해서 문명을 발달시키는데는 말이 가지는 기능에 크게 의존했다는 것입니다.

 

말은 과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일까? 호기심 많은 학자들은 "동물도 지속적으로 학습을 시키면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여기에 대한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동물에 따라서는 많게는 400여개의 단어를 익히고, 이것을 조합해서 간단한 문장(sentence)도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연구한 결과 그것은 단지 자극에 의한 반응이거나 보상에 대한 재강화  내지는 단순한 모방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갓 태어난 원숭이 새끼와 애기를 같은 환경에서 길러 보았으나 역시 원숭이 새끼는 끝내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말은 인간만이 구사가 가능하다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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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진화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 인간의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원숭이는 아직도 원숭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원숭이라는 것입니다. 오스트랄로 피데쿠스(Australo pithecus)는 "남쪽의 원숭이"라는 뜻이고, 자바인(Pithecantropus)이나 베이징인(Sinanthropus)을 원인(猿人)류에 넣는 것은 이들이 원숭이라는 뜻도 됩니다. 인류(Homo)라는 학명을 붙인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이나 크로마뇽인(Cro Magnon)을 "지혜로운 인간"(Homo sapience)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의 신체적인 구조나 뇌의 크기가 현대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설을 믿는다면 태초의 인간들도 말을 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창조설과 진화설의 끝 모르는 논쟁은을 접어두고, 말을 통한 인간의 일생을 살펴 보기로 합시다. 모체로부터 분리된 아기가 처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울음이고, 다음 행위가 본능적으로 먹이를 찾아 열심히 입(혀와 입술, 잇몸 등)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개체를 보존하기 위한 본능인 동시에 말을 하기 위한 준비동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발로 기어 다니다가 어느날 두발로 서면서 신기하게도 말을 하게 됩니다. 걷는 것이 어둔하듯이 말도 어둔합니다. ㅇ (喉音)과 ㅁ (脣音)그리고 ㄴ (舌音)은 비교적 표현되지만 ㅅ(齒音)과 ㄱ (牙音)은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 엄마 앞에서 짝자꿍 아빠 앞에서 ~" 이 노래를 완전히 부를 수 있을려면 어금니가 나고 혀와  입술의 동작이 보다 민첩해 졌을 때 , 다시 말하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야 됩니다.

 

유아들은 엄마 아빠는 그런대로 발음이 되는데 그 다음은 ..... 집에 아가가 있다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고 어금니가 빠지면서 말은 정확성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말을 습득하는 것은 지능에 큰 차이가 없으며 별다른 교육 없이도 주위 환경에 따라 받아 들이는 능력을 인간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상대적인 기호체계이기 때문에 내가 입으로 소리를 내면 상대는 귀로 받아서(들어서) 서로의 의사를 통하게 되는데 자의적인 의사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고정화되면 여기에 구속되어야 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의적이라고 하나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거나 내가 상대편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그리고 모든 지역에서 같은 기호체계가 이루어져 있다면 단일 언어가 형성되어 언어의 분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한 공간구조처럼 언어의 구조도 다양합니다. 19세기 언어학자들은 비교언어학이라는 영역을 설정하고 여러 곳의 언어를 분석해 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너무도 닮은 언어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조어(祖語)로 보여지는 언어끼리 그룹(group)을 만들고 이를 계통화 시켜 인도 유럽어족, 우랄어족, 알타이어족 등의 명칭을 붙였습니다.

 

말은 공간적이면서도 시간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기억이외는 저장이 불가능하고 전달 거리도 멀지 못합니다.(물론 오늘날은 기계의 힘을 빌려서 얼마든지 저장도 하고 멀리 보내기도 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입 대신에 손이, 귀 대신에 눈이 역할을 분담하는 시각적 기호를 만들고, 이를 위한 서로간의 약속, 즉 언어의 다른 표현방법을 써게 되었는데 이것을 글(文字)이라고 하고, 문자언어라고도 합니다. 글과 말이 다른 것은 글은 손을 통해서 쓸 수 있는 도구가 있어야 되고  보는 사람이 읽을 수 능력(시각적 기호의 구분능력)이 전제되어야 되겠지요.

 

2) 최초의 문자들-기억의 보조수단

 

지금의 우리들 주변에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찾기란 어렵지만 30 ~ 40년 전만 하여도 쓰기는 고사하고 읽을 줄도 모르는 문맹(文盲)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지난 사실들을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 최대의 수단이었으나 기억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아지면(용량이 초과되면) 혼자만 알 수 있는 기호를 사용하는 보조 수단을 고안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주막에서 술을 파는 아낙네가 수 많은 건달들이 수시로 찾아와 먹어대는 외상술값을 며칠 혹은 몇 달을 지나서야 받게 되는데 그것 모두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글을 안다면 기록해 두고(통칭 장부라고 하는 것) 쉽게 계산이 되겠지만, 글을 모르는 사람은 벽이나 기둥 등에 여러 형태로 표시를 해두고 그것을 토대로 동그라미 몇 개 작대기 몇 개 등을 근거로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을 대비해서 표시 내용을 상대와 약속이 되었다면 두 사람만의 문자가 탄생(?)되었겠지요. 이런 형태는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보편성과 구속력이 없고 체계적이 못된다는 점에서 문자는 아닙니다. 아무런 장식도 부장품도 없는 무덤을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고분이라고 볼 수 없다는 논리와 마찬가지 이론입니다.

 

나. 문자의 사용과 역사의 시작

 

1) 수메르인의 점토판과 쐐기문자

 

 B C 31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난 이들은 홍수가 지나간 강기슭에서 신전을 세우고 농사를 지었고. 추수가 끝나면 수확의 일부를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를 맡은 신관은 세월이 지나면서 제사뿐만 아니라 다른 일상사에도 관여하게 되었고 따라서 하는 일이 복잡하고 많아졌습니다. 당연히 보조자를 두게 됩니다. 이들 보조자들이 주로 하는 일은 제물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구별해야 하고 제물을 바친 사람에게는 영수증(?)을 발행해 주어야 뒷날의 분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주위에 많은 진흙(粘土)으로 판을 만들어 굳어지기 전에 일정한 내용을 새겨서 햇볕에 말리면 문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새겨진 내용이 회화적이었기 때문에 "그림문자(繪畵문자)라고 합니다. 사용빈도가 많은 것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형상화하면 상형문자(像形)가 됩니다. 이런 것을 뜻글자(表意文字)라고 합니다.

 

이 지역의 주인공들이 바뀌면서 자형(字形)도 곡선들이 직선화되고, 내용면에서도 추상적인 단어를 적을 수 있는 단계로 들어가게 되어 창조신화나 홍수의 내용 등을 기록할 수 있는 소리글자(表音文字)로 발전하게 됩니다. 문자의 발달 과정은 그림문자→뜻글자→소리글자(음절문자, 음소문자)로 이어진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 후 이들은 점토판으로 교과서도 만들고 도서관도  세웠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은 최근의 발굴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막지대의 특이한 기후, 습도가 거의 없는 메마른 공기는 자연저장고 역할을 하여 원형의 손상없이 수 천년전의 점토판문서를 볼 수 있다니 이것도 그들이 말하는 알라의 영광인지? 자형의 끝이 뾰족하다 하여 설형문자(설形:쐐기)라고 하고, 설형을 우리말은 쐐기모양이라는 것인데 쐐기가 무엇인지? 내 교직 생활 중, 이 물음에 정확히 대답한 학생(경상도 지역)은 없다고 기억됩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문자를 처음 사용한 수메르(Sumer)인들이란 누구일까요? 19세기 인류학자들이 내 놓은 언어인류학에서도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이 지역에 널리 거주하고 있는 셈어족이나 햄어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딱 잘라서 누구라고 말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논란의 대상(?)인 환단고기에서는 이들을 우리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대갈(머리) 독(항아리) 칼(knife:刀) 살(나이:해) 굴(tunnel) 등의 순수 우리말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2) Egypt의 히에로글리프(hieroglyph:신성문자) 그리고 파피루스(papyrus)

 

영국대영박물관에 들어서면 높이 1,2m, 넓이 75cm, 폭 30cm 정도의 잘 다듬어진 검은색 비석(?)이 있는데 이것을 로제타석(Rosetta stone)이라고 합니다. 이 검은색의 돌에는 세단으로 나누어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히에로글리피로 14행, 중단에는 디모틱(민간문자)으로 32행, 하단에는 그리이스문자로 54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9년 이집트를 원정했을 때 참호를 파던 군인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이집트 문자가 해독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는 여겼으나 나폴레옹이 넬슨에게 패배하고 알렉산드리아가 영국군에게 점령되면서 이 돌은 영국으로 운반되어 1822년에는 완전히 해독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집트 문자의 해독, 이것은 곧 파라오의 영광과 이집트의 문명이 세상이 알려지는 신호였습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왕묘나 신전 기념비 등 돌에 새긴 것이 대부분이나 당시는 나일강 유역에 무수히 자라는 사초과(莎草科)의 다년생인 파피루스(papyrus)잎에 수초로 만든 잉크와 깃털로 만든 펜으로 문서 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집트 인들은 문자 자체를 매우 신성시했기 때문에 신관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민간문자는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문자가 상업과 무역을 주업으로 하는 페니키아 인들에 의해 소리글자로 변형된 후 그들의 활동로를 따라 그리스에 전해져 알파(A) 베타(B)로 되었고, 역시 그리스 인들의 해상활동을 통하여 로마에 전해져 라틴문자가 되어 세계적인 문자로 발전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지방으로 건너가 설형문자의 틀과 합쳐져 아랍문자가 생겨나고 이를 모체로 위구르문자, 몽고문자, 만주문자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파피루스가 없는 다른 곳에서는 양피지(羊皮紙)가 주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3) 중국의 한자(갑골, 전서, 예서, 해서, 초서 등)와 책 그리고 종이의 발명

 

갑골(甲骨)이란 거북의 등 껍질과 짐승(소)의 뼈를 뜻합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라 해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습니다. 1899년 유약이라는 사람이 베이징의 한약방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감기에 특효약이라는 용골(용의 뼈라는 뜻이지만 짐승의 화석)을 사람들이 사가는 것을 이상히 여겨 모양을 자세히 보았더니 고서체의 잔글씨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고 이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왕의영에게 알림으로서 그 비밀이 벗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의영을 비롯한 갑골문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의화단 사건에 연루되거나 스스로 자결 함으로서 해독의 영광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갑골문은 3000여개의 글자 가운데 그 절반 정도가 해독되어 은 나라가 전설의 왕조가 아니라 실체의 왕조였음이 세상에 알려지고 황하문명이라는 학문의 영역이 생겨났습니다.

 

갑골에 새겨진 내용은 무엇일까요? 정인(貞人:점을 보는 사람)이 점을 쳐서 나온 결과를 기록한 것입니다. 전쟁, 재해, 농사. 질병 등 어려운 현안 문제가 발생하면 점을 쳐서 그 내용을 갑골에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복사(卜辭)라고도 합니다. 그 후 종법과 예법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주 왕조에서는, 점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문자화가 이루어 지면서 목독(木牘) 죽간(竹簡)비단 등에 붓으로 글씨를 써서 가죽끈으로 연결된 책이 만들어 졌습니다.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문자도 통일하였는데 이 때 만들어 진 것이 전서(篆書)였고, 한 대에 와서 이를 간소화한 예서(隸書)가 되었으며 채윤(蔡倫)은 종이를 만들어(製紙術) 사용함으로서(105 A D)문자의 보급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목독은 나무판자를 말하고(보통 木簡이라고 함) 죽간은 대나무로 만든 판을 말합니다 목독이나 죽간은 부피가 많을 뿐 아니라 무겁고 비단은 값이 비싸서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가 종이가 나오면서 값 싸고 가벼운 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궁중의 환관이었던 채윤은 황실 분쟁에 연루되어 고민 끝에 자결했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남북조를 거쳐서 당대에 와서 해서(偕書:한자의 정자)가 되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나라는 비단길을 두고 새로이 일어난 아바스조의 이슬람제국과 한판 승부를 겨루었는데 당의 안서도호였던 고구려출신의 고선지가 이끄는 당의 5만 군사는 탈라스강 전투(751 A D)에서 패함으로서 비단길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비단길을 상실한 당제국은 안사의 난이라는 내우(內憂) 까지 겹쳐 쇠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으나 이슬람으로 잡혀간 5천여명의 당나라의 포로가운데는 제지술을 익힌 사람이 있어서 제지술을 이슬람세계에 전파시켰고, 이슬람을 통해서 12세기경에는 이것이 유럽으로 전해져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4) 우리나라에서 문자생활 (한자, 한글)

 

우리나라에 한자가 전래된 시기를 고조선말기(B C 3기경)정도로 보고 있는데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금석문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문(414, 예서체) 중원고구려비문, 백제의 사택지적비문, 진흥왕순수비문, 임신서기석 등이 중요한 자료입니다.


한자를 우리말로 쓰는데는 불편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중국과 우리의 언어에는 계통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식으로 한자를 풀어 쓴 것이 이두 향찰등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한글은 세종께서 창조하시고(1443) 이를 반포하여(1446) 어린 백성이 널리 쓰게 하였으나 양반사대부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여(당시 학문의 최고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집현전 직제학의 반대 내용은 세 가지인데 첫째가 명나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가 이를 빌미로 명나라로부터 임금이 책망을 당하면 신하로서 민망함을 감당할 수  없으며, 셋째로 백성이 양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글을 모르기 때문인데 모든 백성이 글을 알았을 때 예상되는 혼란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 등) 상용화된 것은 광복이후로 보아야 합니다.

 

명칭도 훈민정음에서 정음으로 다시 언문, 반절, 안글, 칙간글 등의 이름으로 수모를 당하다가 1932년에야 한글이라는 이름과 함께 겨우 제자리를 찾았으나, 일제의 황민화 정책으로 다시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습니다. 비록 한글이 우리 주변국가중 가장 늦게 나타나긴 했으나 그 뛰어난 과학성은 오랜 진통의 대가라고 보아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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