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더스 문명(1)
가. 인도와 아리안들
Pax American(미국의 평화)시대에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은 근대화가 곧 서구 화라는 등식하에 알게 모르게 그들의 가치(과학기술, 문화, 제도, 풍속)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서구 인들의 조상 아리아인(aryan)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인도에서 유럽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 해서 인도-유럽어족(Indo-European)이라 불리는 아리아인(Aryan: 고귀한 것)의 원주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그것을 종합해 보면 동유럽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BC 3000 ~ 1700까지) 알 수 없는 사정에 쫓기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간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들이 유럽에서는 켈트인, 게르만인, 슬래브인, 라틴인, 그리스인과 아시아에서 아나톨리아 고원에 세운 히타이트인, 페르시아제국의 이란(아리아의 땅)인 인도아리아인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 중 europe-aryan들이 다시 동양에 나타난 것은 1498년 5월 바스코 다 가마의 포르투갈 선단이 긴 항해 끝에 인도의 켈리컷에 도착하여 인도 항로를 연 것을 시작으로 다투어 아시아,
특히 인도경영에 나서게 되었는데 영국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1588)한 여세를 몰아 마드래스와 봄베이를 중심으로 동 인도회사를(1600), 이어 네덜란드가(1602) 실론등 섬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은 인도서안의 고아에 들어와 이곳을 식민도시로 만들고, 프랑스도 1664년에 동 인도회사를 재건하고 맹렬한 추격전을 시도하였습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그들의 속성은 여기에서도 잘 나타나 유럽에서의 7년전쟁(1756-63)중에 인도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운 것을 플랏시 전투(1757)라고 합니다. 영국에게 패한 프랑스는 인도에서의 권리를 잃고, 인도 차이나반도로 진출하여 코친차이나를 경영하여 위기를 면하려 하였지만 그 파장이 프랑스대혁명(1789)으로 이어져 부르봉(bourbon)왕조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도 52년간의 긴 영란 전쟁에 지쳐 인도네시아의 향료산지로 방향을 전환함에 따라, 이때부터 인도는 영국의 독점 무대가 되었습니다.
인도경영을 독점한 영국 신사(?)들은 공리주의와 예수의 복음, 대포를 앞세워 음모, 책동, 위협, 이간, 매수, 사기, 정복의 모든 수법을 총동원하여 지방정권을 흡수하고 식민지를 확대하여 돈이 될만한 것은 모조리 실어가 산업혁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당시의 인도는 무굴 제국(1526-1858)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지배는 지방에 군거한 토후들로서 그들의 조상 역시 아리아인들이고, 그 아리안들이 인더스 문명을 정복하고 인도에 진출하여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dravidian)을 지배했던 수법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다만 대포 대신에 놋쇠 무기를, 예수의 복음 대신에 베다가 다를 뿐, 이 지역을 얻기 위해서 그네들끼리 다툰 것, 정복의 방법, 정복 후 원주민 착취 등은 거의 동일합니다.
인더스 문명을 정복한지 실로 3000여년 후 그 인도는 또다른 아리아인들에 의해서 수난사를 써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경제적인 낙후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핵무기를 보유한 몇 안되는 국가 중에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같은 아리아 족끼리 봐 주 긴지? 유목민의 행패인지?
우리들과 인접한 어떤 친구(?)가 핵무기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렇게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그들의 설명대로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는 구차한 변명(자기들이 보유한 것과는 다르다는 논리)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겠지요.
인구 세계 2위, 면적 세계 6위, 잡다한 민족(인종)구성, 700여개의 언어 권, 45%의 문맹률, 힌두교의 응집력으로 통일 유지 및 통치 가능, 문양과 색깔로 이마에 신분표시 등이 인도의 오늘입니다.
나. 인더스 문명이 알려지기까지
식민지 인도에서 영국은 인도의 경제력을 보다 수월하게 착취(?)하기 위해서 내륙과 항구를 연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1856년 카라치에서 바흐르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였는데 레일을 깔기 위해서 펀자브(五河)지방의 땅을 파다가 보니까 수많은 벽돌이 나왔고 공사감독자나 인부들은 이 벽돌을 별 뜻 없이 레일을 깔기 위한 북돋우기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유적이 고대의 거대한 도시 하라파 유적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고 난 후 다시 면밀하게 조사했으나 그 훼손이 너무 심해서 사실을 규명하는데 실패하고, 같은 유적이 다른 곳에도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조사한 결과 하라파에서 남쪽으로 약 650Km가 떨어진 인더스 강 하류에서 모헨조다로(死者의 언덕)를 찾게 되어(1922) 인더스 문명의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조사가 계속되어 현재는 백여 개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문명의 열쇠인 인더스의 문자가 해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이후 아리아인의 베다시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인더스 문명의 실체인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유적과 유물의 이야기를 따라가 봅시다. 이 도시들은 불에 구운 견고한 벽돌로 장방형의 성채(城砦)를 쌓고 성벽(城壁)을 둘렀으며 방목지에서는 소, 물소, 양, 코끼리, 낙타 등을 사육하였고, 농 경지에서는 보리와 밀을 비롯해서 깨, 콩, 대추, 야자열매 등을 심었으며,
집을 짓는데도 벽돌과 견고한 석재가 이용되었는데 규격화된 벽돌은 메소포타미아의 것과 같거나 비슷해서 두 문명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메소포타미아의 벽돌은 햇볕에 건조한 것이 많이 있으나 이곳의 벽돌은 불에 구워서 단단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도시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사전에 치밀하게 설계되고 철저한 감독하에 이루어진 계획도시라는 점입니다. 폭 9 미터 정도의 여러 간선도로를 따라 지역이 구획되고 각 구획 지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작은 도로까지도 벽돌로 포장되어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현대의 어느 설계된 도시에도 손색이 없다는 것입니다.
각 가정에는 우물, 목욕장, 변소가 있고, 벽돌로 만든 배수로(排水路)가 큰길의 방수로(放水路)로 연결되어 완벽하게 하수를 처리하였으며, 거대한 신전이나 능묘(陵墓)가 없는 대신에 대욕장과 곡물창고 같은 거대한 구조물들은 만들었습니다.
물레를 사용하여 만든 채색토기와 도기(표면에 유약을 처리한 것)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토된 것 보다 앞선 것이고, 화폐로 사용되었다고 보여지는 구리막대와 점토판으로 만든 인장과 주사위, 실을 뽑는 물레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상업과 직조기술도 상당히 발달했을 것이라고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유적과 유물에도 불구하고 인더스문명이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과 인장에 새겨진 상형 문자의 해독(解讀)이 안되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문자의 난해성 때문인지 학자들의 접근 방법 잘못인지 혹은 관심이 없어서 힘을 쏟지 않는지도 미지수입니다.
다만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인더스 강의 홍수로 여러 차례 도시가 매몰되었고 매몰된 자리에 다시 도시를 세우면서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전에 편리하게 설계되었다는 것.
지금은 건조한 사막이지만 많은 장작을 필요로 하는 구운 벽돌과 인장의 그림들을 볼 때 4, 5천년 전 이 지방은 강수량이 풍부하고 산림이 울창하였다는 것,
대욕장의 용도가 기도 전에 몸을 정결하게 씻기 위한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 신을 주관하는 신관이 없었고 모든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각자의 소원을 주술(呪術)한 다신교였다는 것,
농경과 육축 외에도 수렵과 어로 상업에 종사했다는 것, 인골의 유형이 여러 개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많은 인종이 혼거 했다는 것,
다른 지역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고 다른 지역에서 인더스의 유물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교류나 교역이 활발했다는 것,
인더스 문명의 최후는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인골에 살해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홍수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침략 때문이라는 것,
다른 한쪽(영국 등 유럽계)에서는 외부의 침략이 아니고 홍수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다른 주장도 하고 있다는 것,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문자가 해독되면 보다 확실하게 밝혀지겠지요.
하라파에서 발굴된 인장(도장:圖章)이나 토기 위의 새겨진 상형문자를 토대로 현재까지 알려진 인더스 문자를 분석해 보면, 396 종이 확인되었고, 인더스 문명 이전부터 시작하여 장기간에 걸쳐 사용되었다는 것과, 같은 시대의 다른 문자와의 유사성은 거의 없고,
수메르 문자 보다는 형태가 발달되었고, 완전한 표음문자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으며, 표의문자나 한정사, 악센트 등을 나타내는 각종 문자를 혼용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 문자에 의한 명문(銘文)은 모두 짧아 평균 6단어에 불과하고.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쓰고 둘째 줄은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는 것까지가 알려지고 있습니다.
살생의 청동무기가 보이지 않고 여러 동식물을 새긴 인장의 그림들, 주사위 등을 유추해 보면 신관의 속박에서 자유로웠던 인더스 인들은 평화적이고 여유 있는 사실들을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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